서태지 자녀 2명 확인, 서태지 이지아 이혼 소송, 이지아 이혼소송
안녕하세요. 저도 서태지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서태지와 이지아씨가 서로 결혼을 했었으며 아이가 2명인 것으로 확인이 되어 큰 충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서태지와 이지아는 이미 이혼 소송 중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큰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게다가 정우성은 얼마전 이지아와 열애중임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 소송 사실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고 하네요.
21일 한 매체는 “톱스타 서태지(39·본명 정현철)와 배우 이지아(33·본명 김지아)가 법적으로 부부였으며 현재 이혼 소송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또한 이지아가 지난 1월 서태지를 상대로 위자료 및 재산분할을 요구하는 이혼소송을 제기했으며 이미 3월과 4월 두 차례 서울가정법원에서 이혼소송에 대한 공판을 가졌다고 전했습니다.
서태지(1972년 2월 21일 ~ )는 대한민국의 대중 음악가이다. 본명은 정현철(鄭鉉哲)이다. 시나위 밴드에 들어가면서 현재의 서태지란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시나위 시절과 달리 댄스 음악을 들고나온 서태지는 데뷔 직후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17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로 발매한 모든 음반이 큰 인기와 화제를 몰고 왔다. 1996년 돌연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및 은퇴를 선언한 서태지는 1998년에 미국 체류 중인 상태로 첫 번째 솔로 음반인 Seo Tai Ji를 발표하였다. 2000년에는 한국으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서태지 본연의 음악적 토대인 록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서태지는 일명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한국에 가져온 문화적 충격은 물론, 그것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이 엄청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한국에 힙합, 뉴 메탈 등의 장르를 소개한 대표적 아티스트 중 하나이며,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 폐지에도 일정 부분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듬해 서울북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한 그는 음악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건 맞지 않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중퇴를 하였다.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멤버 구인광고를 보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활동을 채 하기 전에 해체가 되고, 이후 그는 신중현이 운영하는 카페인 우드스탁에서 이중산을 만나 그의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본 당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스카우트되었다.[3]
당시 시나위는 최고의 밴드로 이름이 널리 퍼졌지만, 방송 출연은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일 정도였고, 리더 신대철과의 의견대립 등으로 말미암아 넷째 음반 Four의 활동을 끝으로 시나위는 잠정 해체되었다. 이후 서태지도 자신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첫 활동 곡으로 〈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 판매 기록했으며 다시 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으며, 1994년 8월 3집을 발표하였다. 3집에는 기존 음반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었고 통일을 다룬 〈발해를 꿈꾸며〉의 성공과 교실 이데아 소동 등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1992년, 1993년, 1994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음반을 발매하였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 때에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연말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이듬해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돌연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 때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2월에는 베스트 음반 Goodbye Best를 발표하였다.
은퇴 선언 이후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년간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5집 음반은 100만 이상의 판매를 올리며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은퇴 번복과 짧은 러닝타임 문제 때문인 논란에 휩싸여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서태지의 지지자와 반대자의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서태지의 반대자들은 28분짜리 EP 수준의 음반을 정규 음반의 가격으로 판매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서태지는 자신의 메시지를 담긴 몇 줄의 이메일과 컴퓨터 영상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 발표 이외에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일체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서태지 6집은 140만 장의 판매고 (서태지닷컴에 의한 기록)을 기록하면서 통산 음반 판매량은 1천만 장을 넘겼다.
서태지 자신은 이 앨범에 담긴 노래의 장르를 ‘감성코어’로 명명했다. 4년의 공백을 불식시키듯 5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그 해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2004년 5월 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서태지 라이브 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최하였다. 이때 서태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신허 마을 옛터’라는 러시아 한인이주 기념비를 헌정하였다.
이후 8월에는 ETPFEST를 진행하였으며, "Watchout" 와 라이브 실황 음반인 Live Tour Zero 04를 발매한 후 다시 다음 음반을 작업하기 위해 인도로 출국하였다. 2005년까지 서태지 7th Issue는 50만 장의 판매량을 올린 것으로 한국음반협회에 보고된 상태이다.
2007년 12월 1일 한정판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벌였으나, 서태지 자신은 출연하지 않고 후배 뮤지션들의 공연으로 채워졌다.
2008년 7월 29일, 서태지는 8집 정규 음반 발매 이전에 싱글 음반인 ATOMOS PART MOAI를 우선 발매하였다. 발매와 거의 동시에 10만 장이 전부 선예약주문으로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워 추가로 5만 장을 추가 제작하였다고 밝혔다.[4]
2008년 7월 29일에는 MBC 일산 드림센터에서 MBC에서 방영될 컴백스페셜을 위한 미니콘서트를 개최하였고, 8월 1일에는 코엑스에서 ‘게릴라 콘서트’[5]를 열었다. 이후 8월 6일,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서태지 컴백스페셜 -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 첫 번째 싱글 곡인 "Moai"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본격적인 8집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태지는 이번 앨범을 네이처 파운드(Nature Pound)라는 신조어를 이용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자연과 여행을 주제로 이 같은 장르를 만들었다.”, “자연을 심장처럼 두드린다는 표현”이라며 ‘쪼개다’, ‘부수다’라는 어감도 좋다고 하여 ‘네이처 파운드’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8월 14, 15일에는 마릴린 맨슨, 디 유즈드, 드래곤 애쉬 등이 참여한 2008년 ETPFEST를 개최하였다.[6] 9월 27일에는 톨가 카쉬프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더 그레이트 2008 서태지 심포니〉 공연을 했다. 12월 7일에는 톨가 가쉬프와 함께 베토벤 바이러스의 모델로 알려진 성남시립오케스트라와 〈서태지 심포니 앙코르〉 공연을 하였다.
"T'ik T'ak"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으며, 영화 《20세기 소년》과 공동프로모션으로 CGV 극장에서 뮤직비디오가 선행 공개되었고 이후 곰TV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했다. 이후 서태지는 10월 1일 KTF를 통해 서태지폰을 출시하여 두 번째 싱글 ATOMOS PART SECRET의 1번 트랙인 "BERMUDA Triangle"를 선공개하고 10월 24일에 뮤직비디오와 음원을 배포했다.
2008년11월 30일, 서태지는 《SBS 인기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본격적인 공중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서태지는 12월 6일에 MBC에서 방영하는 《쇼 음악중심》, SBS에서 방영하는 《인기가요》에 출연하였다. 여기서 서태지는 "Human Dream"의 ‘쫄핑크 댄스’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이후 10여 년 만에 댄스가수로서의 면모를 다시 선보였다. "Human Dream"의 뮤직비디오는 12월 12일 방송된 MBC 에브리원의 《신해철 스페셜 에디션》 1회에 처음 공개되었다. 이 뮤직비디오는 블록버스터급의 뮤직비디오로 부산 벡스코 앞에서 대규모 폭발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후 파이널 에피소드는 곰TV를 통해 공개했다. 현재까지 서태지의 8집 첫 번째 싱글 앨범은 2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2008년12월 31일, 2008년 마지막날, 서태지는 [Adieu 2008 쫄핑크파티 with 태지]라는 타이틀로 서울 하얏트 호텔 그랜드볼륨에서 1,000여명의 팬들과 함께 연말 송년파티를 열었다. 이날 팬들에게 받은 물품들을 기증받아 나눔바자회도 함께 실시하여 수익금 224만 6000원 전액을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 청음회관에 기부하였으며, 팔리지 않은 물품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였다.[7]
2009년 7월 25일에 전국 투어를 마친 서태지는 8월 15일에 잠실종합운동장 내 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2009년 ETPFEST에 참가했다. 이번 ETPFEST 에는 림프 비즈킷, 나인 인치 네일즈, 킨, 피아, 검엑스 등이 참가했다.
2009년 8월 29일과 8월 30일에 열린 The Möbius Encore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8집 활동을 끝마친 서태지는 당분간 휴식을 취한 뒤 8집 DVD 와 9집 준비를 할 예정이다.
2009년 12월 24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있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 CD를 발매했다.
2010년 1월 22일~2월 4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3만 5천명과 함께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과 공연 후기가 담긴 〈서태지 심포니〉가 2주간 한정상영으로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에서 개봉되었다. 국내 가수로는 최초의 콘서트 영상 유료상영[8] 의 기록을 남겼으며,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2주동안 일일 최다관객수 2,138명, 전체 누적관객수 16,013명으로 국내 단관개봉 영화사상 최고의 관객 동원스코어를 기록하였다.
2010년 2월 23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있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과 공연 후기가 담긴 〈서태지 심포니>가 일반판 블루레이 및 DVD 형식으로 발매되었다.
2010년 5월 21일~6월 27일에는 2009년 8월 30일에 있었던 The Mobius Encre 공연 실황이 담긴 <The Mobius> 가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5/21~6/13)에서 개봉되었다. 기존 MBC에서 상영했던 <서태지 심포니>와는 달리 미공개 컨텐츠 였기 때문에 예매율이 높아 메가박스에서 유래없는 풀타임상영(쉬는 시간없이 9회차 내리 상영)을 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지방관객들을 위해 부산 서면 메가박스(6/19~6/27)에서 연장상영을 실시하게 되었다.[9] 그 결과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일일 최다관객수 3,578명, 전체 누적관객수 31,879명이 관람하여, 종전 서태지심포니(16,013명)가 세운 단관사상 최고 기록을 거진 더블 스코어로 다시한번 갱신하였다.
2010년 7월 16일에는 2009년 6월 13일부터 시작된 2009 Seotaiji Band Live Toue [The Mobius] 공연 실황앨범이 발매되었다.
시나위 시절과 달리 댄스 음악을 들고나온 서태지는 데뷔 직후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17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로 발매한 모든 음반이 큰 인기와 화제를 몰고 왔다. 1996년 돌연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및 은퇴를 선언한 서태지는 1998년에 미국 체류 중인 상태로 첫 번째 솔로 음반인 Seo Tai Ji를 발표하였다. 2000년에는 한국으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서태지 본연의 음악적 토대인 록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서태지는 일명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한국에 가져온 문화적 충격은 물론, 그것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이 엄청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한국에 힙합, 뉴 메탈 등의 장르를 소개한 대표적 아티스트 중 하나이며,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 폐지에도 일정 부분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태지 프로필
어린 시절 (1972년 ~ 1989년)
197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재동초등학교를 거쳐 대동중학교 2학년 때인 1986년에 친구들과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음악에 심취한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는 달리 가출을 자주 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교 537명 중 꼴찌를 할 정도로 공부와는 멀어지게 되었다.이듬해 서울북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한 그는 음악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건 맞지 않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중퇴를 하였다.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멤버 구인광고를 보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활동을 채 하기 전에 해체가 되고, 이후 그는 신중현이 운영하는 카페인 우드스탁에서 이중산을 만나 그의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본 당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스카우트되었다.[3]
시나위 (1989년 ~ 1990년)
신대철에게서 스카우트된 서태지는 17세 때인 1989년 시나위에 합류하여 베이시스트로 활약하였다. 당시 시나위의 보컬은 김종서였다.당시 시나위는 최고의 밴드로 이름이 널리 퍼졌지만, 방송 출연은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일 정도였고, 리더 신대철과의 의견대립 등으로 말미암아 넷째 음반 Four의 활동을 끝으로 시나위는 잠정 해체되었다. 이후 서태지도 자신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1~4집)의 인기몰이 및 갑작스러운 은퇴 (1991년 ~ 1996년)
시나위의 해체 이후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서태지는 1991년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고 1992년 4월,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하였다. MBC의 《특종 TV 연예》에 데뷔하게 된 그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TV 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난 알아요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첫 활동 곡으로 〈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 판매 기록했으며 다시 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으며, 1994년 8월 3집을 발표하였다. 3집에는 기존 음반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었고 통일을 다룬 〈발해를 꿈꾸며〉의 성공과 교실 이데아 소동 등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1992년, 1993년, 1994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음반을 발매하였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 때에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연말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이듬해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돌연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 때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2월에는 베스트 음반 Goodbye Best를 발표하였다.
은퇴 선언 이후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년간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미국체류와 첫 솔로 음반(5집) (1997년 ~ 1999년)
2년 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998년 7월 7일 첫 번째 솔로 음반을 갑자기 발표하였다. 훗날 서태지는 당시를 회고하며 “은퇴를 선언했을 때 음악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1년의 휴식 끝에 음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첫 솔로 음반을 발표할 당시 “연예인으로는 은퇴한 서태지가 음악가로서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음반은 아무런 제목도 없이 Seo Tai Ji (서태지)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으며, 수록된 6곡의 노래 모두 특정한 제목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6곡의 노래와 3곡의 간주곡이 담긴 28분짜리 소형 음반으로, 보라색 케이스에 담겨 발매되었다. 팬들은 이 음반을 솔로 1집으로 부르지 않고 ‘5집’으로 부른다.5집 음반은 100만 이상의 판매를 올리며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은퇴 번복과 짧은 러닝타임 문제 때문인 논란에 휩싸여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서태지의 지지자와 반대자의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서태지의 반대자들은 28분짜리 EP 수준의 음반을 정규 음반의 가격으로 판매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서태지는 자신의 메시지를 담긴 몇 줄의 이메일과 컴퓨터 영상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 발표 이외에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일체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본격적 복귀(6집)와 ETPFEST (2000년 ~ 2003년)
은퇴 선언 후 4년 7개월 만인 2000년 8월 11일에 서태지가 인터넷 팬사이트를 통해 컴백을 알렸고 2000년 8월 29일, 김포공항을 통하여 미국에서 귀국하여 통산 6집을 발매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김포공항은 수천 명의 팬들과 수백 명의 기자들로 마비상태가 되었으며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뉴 메탈을 시도한 음악들은 많은 화제가 되었다. 서태지가 컴백 직후 가진 콘서트인 《20000909 서태지 컴백콘서트》는 추석특집으로 MBC에 방송되었고,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요일에 재방송까지 하였다. 2001년 서머 소닉에 참여한 후, 한국에서도 대규모 록페스티벌인 ETPFEST(Eerie Taiji People FESTival: 괴기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 이티피페스트)라는 대규모 록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서태지 6집은 140만 장의 판매고 (서태지닷컴에 의한 기록)을 기록하면서 통산 음반 판매량은 1천만 장을 넘겼다.
7th Issue (2004년 ~ 2007년)
2004년 1월 사회적인 메시지 등을 담은 7집 음반 Seotaiji 7th Issue를 발표하였다. 컴백 공연이었던 2004 Live Wire에서 그는 콘(Korn), 피어 팩토리(Fear Factory) 등 유명 해외 뮤지션과 합동 공연을 벌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서태지 자신은 이 앨범에 담긴 노래의 장르를 ‘감성코어’로 명명했다. 4년의 공백을 불식시키듯 5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그 해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2004년 5월 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서태지 라이브 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최하였다. 이때 서태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신허 마을 옛터’라는 러시아 한인이주 기념비를 헌정하였다.
이후 8월에는 ETPFEST를 진행하였으며, "Watchout" 와 라이브 실황 음반인 Live Tour Zero 04를 발매한 후 다시 다음 음반을 작업하기 위해 인도로 출국하였다. 2005년까지 서태지 7th Issue는 50만 장의 판매량을 올린 것으로 한국음반협회에 보고된 상태이다.
2007년 12월 1일 한정판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벌였으나, 서태지 자신은 출연하지 않고 후배 뮤지션들의 공연으로 채워졌다.
6th Atomos (2008년 ~ 2009년)
- 싱글1(8th Atomos Part Moai) 활동(2008년 7월~2008년 12월)
2008년 7월 29일, 서태지는 8집 정규 음반 발매 이전에 싱글 음반인 ATOMOS PART MOAI를 우선 발매하였다. 발매와 거의 동시에 10만 장이 전부 선예약주문으로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워 추가로 5만 장을 추가 제작하였다고 밝혔다.[4]
2008년 7월 29일에는 MBC 일산 드림센터에서 MBC에서 방영될 컴백스페셜을 위한 미니콘서트를 개최하였고, 8월 1일에는 코엑스에서 ‘게릴라 콘서트’[5]를 열었다. 이후 8월 6일,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서태지 컴백스페셜 -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 첫 번째 싱글 곡인 "Moai"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본격적인 8집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태지는 이번 앨범을 네이처 파운드(Nature Pound)라는 신조어를 이용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자연과 여행을 주제로 이 같은 장르를 만들었다.”, “자연을 심장처럼 두드린다는 표현”이라며 ‘쪼개다’, ‘부수다’라는 어감도 좋다고 하여 ‘네이처 파운드’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8월 14, 15일에는 마릴린 맨슨, 디 유즈드, 드래곤 애쉬 등이 참여한 2008년 ETPFEST를 개최하였다.[6] 9월 27일에는 톨가 카쉬프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더 그레이트 2008 서태지 심포니〉 공연을 했다. 12월 7일에는 톨가 가쉬프와 함께 베토벤 바이러스의 모델로 알려진 성남시립오케스트라와 〈서태지 심포니 앙코르〉 공연을 하였다.
"T'ik T'ak"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으며, 영화 《20세기 소년》과 공동프로모션으로 CGV 극장에서 뮤직비디오가 선행 공개되었고 이후 곰TV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했다. 이후 서태지는 10월 1일 KTF를 통해 서태지폰을 출시하여 두 번째 싱글 ATOMOS PART SECRET의 1번 트랙인 "BERMUDA Triangle"를 선공개하고 10월 24일에 뮤직비디오와 음원을 배포했다.
2008년11월 30일, 서태지는 《SBS 인기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본격적인 공중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서태지는 12월 6일에 MBC에서 방영하는 《쇼 음악중심》, SBS에서 방영하는 《인기가요》에 출연하였다. 여기서 서태지는 "Human Dream"의 ‘쫄핑크 댄스’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이후 10여 년 만에 댄스가수로서의 면모를 다시 선보였다. "Human Dream"의 뮤직비디오는 12월 12일 방송된 MBC 에브리원의 《신해철 스페셜 에디션》 1회에 처음 공개되었다. 이 뮤직비디오는 블록버스터급의 뮤직비디오로 부산 벡스코 앞에서 대규모 폭발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후 파이널 에피소드는 곰TV를 통해 공개했다. 현재까지 서태지의 8집 첫 번째 싱글 앨범은 2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2008년12월 31일, 2008년 마지막날, 서태지는 [Adieu 2008 쫄핑크파티 with 태지]라는 타이틀로 서울 하얏트 호텔 그랜드볼륨에서 1,000여명의 팬들과 함께 연말 송년파티를 열었다. 이날 팬들에게 받은 물품들을 기증받아 나눔바자회도 함께 실시하여 수익금 224만 6000원 전액을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 청음회관에 기부하였으며, 팔리지 않은 물품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였다.[7]
- 싱글2(8th Atomos Part Secret) 활동(2009년 2월~2009년 6월)
- 8집 정규음반(8th Atomos) 발매 및 전국투어(2009년 7월~2009년 8월)
2009년 7월 25일에 전국 투어를 마친 서태지는 8월 15일에 잠실종합운동장 내 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2009년 ETPFEST에 참가했다. 이번 ETPFEST 에는 림프 비즈킷, 나인 인치 네일즈, 킨, 피아, 검엑스 등이 참가했다.
2009년 8월 29일과 8월 30일에 열린 The Möbius Encore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8집 활동을 끝마친 서태지는 당분간 휴식을 취한 뒤 8집 DVD 와 9집 준비를 할 예정이다.
- 8집 공백기 시작(2009년 9월~현재)
2009년 12월 24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있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 CD를 발매했다.
2010년 1월 22일~2월 4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3만 5천명과 함께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과 공연 후기가 담긴 〈서태지 심포니〉가 2주간 한정상영으로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에서 개봉되었다. 국내 가수로는 최초의 콘서트 영상 유료상영[8] 의 기록을 남겼으며,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2주동안 일일 최다관객수 2,138명, 전체 누적관객수 16,013명으로 국내 단관개봉 영화사상 최고의 관객 동원스코어를 기록하였다.
2010년 2월 23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있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과 공연 후기가 담긴 〈서태지 심포니>가 일반판 블루레이 및 DVD 형식으로 발매되었다.
2010년 5월 21일~6월 27일에는 2009년 8월 30일에 있었던 The Mobius Encre 공연 실황이 담긴 <The Mobius> 가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5/21~6/13)에서 개봉되었다. 기존 MBC에서 상영했던 <서태지 심포니>와는 달리 미공개 컨텐츠 였기 때문에 예매율이 높아 메가박스에서 유래없는 풀타임상영(쉬는 시간없이 9회차 내리 상영)을 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지방관객들을 위해 부산 서면 메가박스(6/19~6/27)에서 연장상영을 실시하게 되었다.[9] 그 결과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일일 최다관객수 3,578명, 전체 누적관객수 31,879명이 관람하여, 종전 서태지심포니(16,013명)가 세운 단관사상 최고 기록을 거진 더블 스코어로 다시한번 갱신하였다.
2010년 7월 16일에는 2009년 6월 13일부터 시작된 2009 Seotaiji Band Live Toue [The Mobius] 공연 실황앨범이 발매되었다.
서태지의 영향
하지만, 서태지는 이 뮤직비디오를 자신의 음악에서 표현의 한 도구로 삼았다.[12]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뮤직비디오를 활용했으며, 당시 한국의 촬영기술은 미비했지만 이제는 영상음악이 아닌 그 구성에서 미국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수준의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다.[13]
데뷔 3개월 후 서태지는 결국 매니저와 결별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지금까지 본인의 모든 스케줄 및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기 시작했고, 이후 요요기획을 설립하여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재도 서태지는 특정 기획사 소속 아티스트가 아닌 자신만의 기획사 ‘서태지 컴퍼니’를 차려 활동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시중에는 이미 불법 영상집들과 나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사진이 불법으로 인쇄되어 싸구려 상술의 일환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초상권이라는 당시로써는 정말 생소했던 개념을 들어 철저히 대응해 나갔다.[16][17]
서태지는 예전부터 아티스트가 기획사나 음반저작권협회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개진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독립 기획사를 차려 활동 중이며, 2006년부터는 음악저작권협회를 상대로 저작권료 반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서태지 패션이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디자인이라는 점과 비만 등으로 열등감을 갖기 쉬운 몸매를 드러내지 않아 몸매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에 영향을 끼치는 등의 사회적 요인 또한 작용하였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정규 앨범 외에도 다수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 서태지는 8집에서 2개의 싱글과 하나의 앨범을 발매하는 방식으로 전곡을 타이틀곡화 했으며, 직접 만든 새로운 장르인 네이쳐 파운드(Nature Pound)를 도입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시절, 매니저의 무분별한 방송 스케줄 구성으로 양질의 공연을 선보이지 못한다고 판단한 서태지는 매니저와의 결별하고,[22] 2집 이후로는 각종 예능·교양 프로그램의 출연을 직접 선별하여 출연하였다. 방송사의 출연요청을 거절하는 것 역시 당시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대중의 절대적인 인기와 서태지의 프로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서태지 솔로활동 이후부터는 공연을 직접 기획·출현하는 방식 위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방송활동은 공연을 편집하여 내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존 방송프로그램의 게스트 출연보다는 컴백콘서트, ETPFEST, 전국투어 콘서트 등의 단독 특집 프로그램을 통하여 출연하는 편이며, 활동기마다 사전녹화방식을 통하여 방송 3사의 가요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또한, 관련 서적과 같은 의미로 서태지를 분석한 프로그램이 많다. 다음 방송 목록 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각종 음악 프로그램과 시상식은 제외했다.
콘서트, 주요 공연
서태지가 직접 기획하지 않은 콘서트에는 '참가'라고 표시하였다. 그 외 모든 공연은 서태지가 직접 기획·출연한 단독 콘서트이다. ETPFEST, 위성콘서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콘서트, 심포니 협연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공연으로 한국 공연문화 및 대중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뮤직비디오의 활성화
1980년대 초반 미국의 MTV가 개국하면서, 음악문화에서 뮤직비디오란 새로운 장르가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10] 그리고 10년이 지난 한국에서는 날로 발전하는 미국의 뮤직비디오 문화와 비교하면 뮤직비디오란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노래방에서 사용하는 영상음악만이 존재했다. 방송과 가수들은 음악의 한 문화로서 뮤직비디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개념도 미비했다.[11]하지만, 서태지는 이 뮤직비디오를 자신의 음악에서 표현의 한 도구로 삼았다.[12]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뮤직비디오를 활용했으며, 당시 한국의 촬영기술은 미비했지만 이제는 영상음악이 아닌 그 구성에서 미국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수준의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다.[13]
기획사와 가수 관계의 재정립
가요계에서 기획사 시스템은 가수 개인의 의사나 희망보다는 매니저와 기획사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서태지 역시 데뷔 당시 이 악습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스터 테이프를 들고 기획사들을 전전했고, 기획자 유대영을 만나 앨범 제작과 방송 데뷔를 할 수 있었다. 데뷔 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큰 인기를 누렸고, 기획사는 최대한 많은 이익을 위해 엄청난 스케줄을 요구하였다. 훗날 서태지는 이때 음악을 만들 시간이 너무나 적어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힘들었고, 이것이 팀 해체의 한 원인이었다고 고백하였다.데뷔 3개월 후 서태지는 결국 매니저와 결별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지금까지 본인의 모든 스케줄 및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기 시작했고, 이후 요요기획을 설립하여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재도 서태지는 특정 기획사 소속 아티스트가 아닌 자신만의 기획사 ‘서태지 컴퍼니’를 차려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초상권 개념의 확립
1990년대 초까지 저작권, 초상권이라는 단어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1992년 9월 국내 비디오 산업의 저작권 분쟁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사건의 출발은 전 매니저와 결별을 하기 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을 놓고 매니저가 서태지의 동의 없이 한 비디오 제작자와 판권계약을 했던 일에서 출발했다. 서태지는 서태지대로 자신이 고른 제작회사와 판권계약을 마친 상태였지만 이 때문에 동시에 두 곳에서 서태지와 이이들의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 외에도 몇몇 프로덕션에서 불법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이미 시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태지는 이들을 고소하고, 뮤직비디오에 대한 저작권을 들어 서태지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14][15]이와 더불어 시중에는 이미 불법 영상집들과 나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사진이 불법으로 인쇄되어 싸구려 상술의 일환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초상권이라는 당시로써는 정말 생소했던 개념을 들어 철저히 대응해 나갔다.[16][17]
서태지는 예전부터 아티스트가 기획사나 음반저작권협회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개진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독립 기획사를 차려 활동 중이며, 2006년부터는 음악저작권협회를 상대로 저작권료 반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새로운 패션 문화의 창조
서태지는 거리패션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1990년대 패션유행을 선도했다. 1집 〈난 알아요〉에서는 밝은 랩댄스곡에 어울리도록 상표를 떼지 않은 원색 의상과 컬러풀한 티셔츠를 착용한 스쿨룩 패션을 선보였고[19] 2집 〈하여가〉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레게와 힙합에 맞춰 힙밥바지와 레게머리를 했다. 힙합바지는 방송불가 판정을 받아 다른 스타일로 금세 바꿔야 했지만, 레게머리는 청소년층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20] 특히 2000년에 서태지가 귀국할 때 입고 들어온 삼지창 흑백무늬의 옷은 명절 전후 경향의 옷가게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21]서태지 패션이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디자인이라는 점과 비만 등으로 열등감을 갖기 쉬운 몸매를 드러내지 않아 몸매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에 영향을 끼치는 등의 사회적 요인 또한 작용하였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서태지 발표 음반
정규 앨범 외에도 다수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 서태지는 8집에서 2개의 싱글과 하나의 앨범을 발매하는 방식으로 전곡을 타이틀곡화 했으며, 직접 만든 새로운 장르인 네이쳐 파운드(Nature Pound)를 도입했다.
서태지 공연·방송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시절, 매니저의 무분별한 방송 스케줄 구성으로 양질의 공연을 선보이지 못한다고 판단한 서태지는 매니저와의 결별하고,[22] 2집 이후로는 각종 예능·교양 프로그램의 출연을 직접 선별하여 출연하였다. 방송사의 출연요청을 거절하는 것 역시 당시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대중의 절대적인 인기와 서태지의 프로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서태지 솔로활동 이후부터는 공연을 직접 기획·출현하는 방식 위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방송활동은 공연을 편집하여 내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존 방송프로그램의 게스트 출연보다는 컴백콘서트, ETPFEST, 전국투어 콘서트 등의 단독 특집 프로그램을 통하여 출연하는 편이며, 활동기마다 사전녹화방식을 통하여 방송 3사의 가요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또한, 관련 서적과 같은 의미로 서태지를 분석한 프로그램이 많다. 다음 방송 목록 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각종 음악 프로그램과 시상식은 제외했다.
콘서트, 주요 공연
서태지가 직접 기획하지 않은 콘서트에는 '참가'라고 표시하였다. 그 외 모든 공연은 서태지가 직접 기획·출연한 단독 콘서트이다. ETPFEST, 위성콘서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콘서트, 심포니 협연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공연으로 한국 공연문화 및 대중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집(1992년)
- 《'92 서태지와 아이들 라이브 콘서트》(8월 16일)
- 환경보전 콘서트 92 내일은 늦으리 참가, '나를용서해주오'발표
- 2집(1993년)
- 《'93 마지막 축제》(12월 23일~12월 29일)
- 환경보전 콘서트 93 내일은 늦으리 참가, '상실'발표
- 3집(1994~1995년)
- 《'94 여름 새로운 도전》3집 컴백콘서트(8월 13일~8월 15일)
- 《'95 다른 하늘이 열리고》(1월 11일~1월 16일)
- 환경보전 콘서트 94 내일은 늦으리 참가
- 4집(1995년)
- 《‘필승’ 게릴라 콘서트》(정규 콘서트는 아니지만, 필승 뮤직비디오 촬영차 압구정, 삼성동 등을 돌며 한국 최초의 게릴라 콘서트를 기획·진행했다.)
- 환경보전 콘서트 95 내일은 늦으리 참가
- 6집(2000년)
- 《0909 서태지》, 6집 컴백콘서트 펜싱경기장(9월 9일)
- InEmpire Super Concert 참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9월 16일)
- TTL CONCERT 2000 참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10월 15일)
- 《잠실 세계평화 음악회》 참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10월 19일)
- 《2000-2001 태지의 話》 전국투어 콘서트, KBS 88체육관 외 10회(12월 23일~1월 17일)
- 《2000-2001 태지의 話 앵콜》, 올림픽체조경기장(2월 3일)
- 6집 공백기(2001~2002년)
- 2001 Summer Sonic Rock Festival 참가, 일본 오사카, 도쿄(8월 18일~8월 19일)
- 1011 ETPFEST(韓-日연계 위성콘서트), 잠실 보조경기장(10월 11일)
- 2002 ETPFEST 전야제, 잠실 주경기장(10월 25일) (라인업:스키조, 트랜스픽션, 넬, 45 RPM)
- 2002 ETPFEST, 잠실 보조경기장(10월 26일) (라인업: 리쌍, 피아, 디아블로, YG패밀리, 도프헤즈, 라이즈, 스크레이프, 히데 영상공연, Tommy Lee, 서태지)
- 7집(2004년)
- '04 Live Wire 7집 컴백콘서트, 올림픽 체조경기장(1월 29일~2월 1일) (게스트: 콘, 피어팩토리, 넬, 피아)
- Seotaiji Live concert in Vladivostok, 러시아 블라디보스톡(5월 8일)
- Zero 2004 전국투어 콘서트, KBS 88체육관 외 10회(6월 18일~7월 9일)
- Zero 2004 앵콜, 잠실체육관(7월 11일)
- 2004 ETPFEST, 잠실 주경기장(8월 10일)(라인업: 서태지, 검엑스, 피아, 페즈, 지브라헤드, 후바스 탱크, 크리스토퍼테일러 밴드)
- 7집 공백기(2007년)
- 《서태지 15주년 기념 콘서트》, KBS88체육관, 서태지는 불참 (12월 1일) (라인업: 넬, 나윤권, 에픽하이, 피아, 스윗소로우, 트랜스픽션, 바닐라유니티, 45rpm, 앤썸, TIP Crew, 빅뱅(영상), 임백천, 호란, 윤진서, 유세윤)
- 8집(2008 ~ 2009년)
- 《‘틱탁’게릴라콘서트》8집 컴백기념, COEX 피아노광장(8월 1일)
- 2008 ETPFEST 전야제, 잠실 주경기장(8월 14일) (라인업: 선데이브런치, 스위밍 피쉬, 닥터코어911, 슈가도넛, 트랜스픽션, 스키조, 크라잉넛, 에픽하이, Daishi Dance, 클래지콰이, 신이치오사와)
- 2008 ETPFEST, 잠실 야구경기장(8월 15일)(라인업: 야마아라시, 바닐라유니티, 디아블로, Death cab for cutie, 피아, Monky Majik, 맥시멈 더 호르몬, Dragon Ash, The Used, 서태지, Marilyn Manson)
- The Great 2008 Seotaiji Symphony With Tolga Kashif Royal Philharmonic, 상암 월드컵경기장(9월 27일)
- Seotaiji Symphony With Tolga Kashif 앵콜, 잠실 실내체육관(12월 7일)
- 《‘쫄핑크’게릴라콘서트》SBS가요대전 사전녹화, 명동 우리은행 사거리(12월 22일)
- 《Adieu 2008 쫄핑크파티 with 태지》, 하얏트 호텔 그랜드볼룸(12월 31일)
- 《2009 서태지 싱글2 발매기념 WORMHOLE》, 올림픽 홀(3월 14일~3월 15일) (게스트: 요조, 검엑스, 장기하, 피아)
- 2009 ‘The Möbius’ 전국투어 콘서트, 용산 전쟁기념관 외 9회(6월 13일~7월 25일) (게스트: 바세린, 피아, 뷰렛 등 다수)
- 2009 ETPFEST, 잠실 보조경기장(8월 15일)(라인업: FADE, 검엑스, 피아, Boom Boom Satellites, KEANE, Limp Bizkit, NIN, 서태지)
- 2009 ‘The Möbius’ 앵콜, 잠실 체조경기장(8월 29일~8월 30일)
서태지 출연 방송 프로그램
서태지는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데뷔 이후 신세대들에게 받은 열광적인 지지와 영향력은 기존 기성세대들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언론에서 붙여준 '문화대통령'이라는 별명은 그 파급력을 잘 표현해 준다.) 언론들은 '왜 하필 서태지인가?'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서적·시사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법들로 '서태지 신드롬'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사회적으로 많은 이슈를 불러일으킨 서태지와 아이들을 분석하는 서적들은 4집이후 본격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1월 31일 이후 2000년 컴백 이전까지 본격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되돌아 평가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주목할만한 점은 (98년 5집 발매 외에는) 전혀 활동이 없었고 컴백의사를 밝히지 않았음에도, 약 5년 동안 지속적으로 서태지에 관한 서적이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서태지와 아이들의 단 4년간의 활동은 은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언론과 대중들에게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6집으로 컴백하면서 서태지가 현재진행형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함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다시 미래로 미루어졌다.
여기 등록한 서적들은 가사집, 화보, 악보집, 위인전, 대중가요사 관련 서적 등을 제외한 서적들이다.
은퇴가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서태지도 인정한 내용이다. 서태지가 한때 몸담았던 시나위의 6집 앨범(1997년 2월 발매)의 〈은퇴선언〉이라는 곡은 서태지의 은퇴를 풍자하고 있다. (이 점에는 많은 이견이 있다. 서태지는 탈퇴 이후에도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과의 관계가 꽤 좋았다는 설이 있어 풍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은퇴 이후 처음으로 발매한 앨범인 5집에 대해서는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과 함께 EP 수준의 짧은 길이의 음반이 너무 비싸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 비판은 2008년에 발매한 싱글과 맥을 같이하며 일부 음악팬들은 3곡과 1곡의 리믹스가 들어 있는 싱글이 다른 가수의 정규 음반 보다 비싸다는 주장을 하기도 특별 대우 등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태지는 공식 팬클럽을 두지 않는다. 서태지 팬들은 일반적으로 서태지 매니아로 통칭되며, 서태지닷컴 공식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생적인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통하여 주로 소통한다. 서태지 매니아들은 어느 사회문화단체 못지않게 대중문화 및 사회이슈에 관심이 있고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 오고 있다. 1996년 사전심의제도 폐지 이후, 음악순위제 폐지운동, 저작권 지키기 등 음악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활발히 해왔다.
《15주년 기념앨범 - [&] Seotaiji 15th Anniversary》가 2007년 11월 29일 발매를 앞두고 11월 초 예약판매를 시작하였는데 9만 5천원의 고가에도 조기에 품절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1만 5천 장 한정판인 탓에 모든 인터넷 음반구매사이트의 예약이 폭주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서태지컴퍼니 인터넷쇼핑몰 ETP Shop 판매물량도 홈페이지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다운되어 판매가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결국 추첨으로 판매하게 되었다.
또한, 앨범발매 취지와는 다르게 인터넷상에서 20만 원 이상의 고가의 가격으로 불공정 거래가 발생하였고 앨범판매 사기사건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팬들의 다중구매 때문에 많은 팬들이 앨범구매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앨범 조기품절 이후 일반판 발매를 둘러싸고 팬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등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생하여 결국 서태지컴퍼니 측에서 1~7집 정규앨범 리마스터링판 재발매를 결정하게 되었다.
2009년 4월 3일 서태지와 아이들 1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2집, 2009년 5월 22일 서태지와 아이들 3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을 재발매했다. 2009년 9월 29일에는 5집이자 첫 솔로 앨범인 Seo Tai Ji가 재발매되었으며, 2009년 10월 29일에는 6집인 Seo Tai Ji 6가 재발매되었다. 빼빼로데이인 11월 11일에는 감성코어인 7집 Seotaiji 7th Issue가 재발매되었다. 1 ~ 7집 리마스터링 재발매 음반에는 15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라이브와 리믹스음원, 디지털 싱글 Watch Out 등이 히든트랙으로 수록되었다.
<출처 : 위키피아 및 인터넷 검색>
1집(1992년)
- MBC, 《특종 TV 연예》(데뷔무대, 서태지와 아이들로 출연한 첫 방송)
- MBC, 《배철수의 기분 좋은 날》, 〈조영남과 횡설수설〉
- MBC, 《인간시대》 (7월 20일)
-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일요스타앨범〉(콩트 '죽은 시인의 사회', '몰래카메라-어떤 뮤직비디오')[23]
- KBS, 《한바탕 웃음으로》, 〈총각파티〉 등 다수
- 2집(1993년)
-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댄싱히어로〉
- 3집(1994년)
- KBS, 《지구촌 영상음악》
- MBC, 《스타 쇼》
- MBC, 《TV칼럼 세계인이 됩시다》(3회 동안 출연)
-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트로이카 탕탕탕〉
-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8월 27일)
- 4집(1995년)
-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송년 특집 폭소 이벤트〉(12월 31일)
- KBS1TV, 《빅쇼》, 〈서태지와 아이들, 김종서 시대교감〉
- SBS, 《전파왕국》(10월 22일)
- 6집(2000년)
- MBC, 《컴백 스페셜 - 서.태.지》(9월 9일)
- M-Net, 《컴백 기자회견》(9월 14일)
- MBC, 《음악캠프》(10월 21일, 11월 18일)
- 인터넷생방송, 《아주 특별한 만남》(11월 24일)
- 7집(2004년)
- MBC, 《서태지 20040129》(1월 29일)
- SBS, 《인기가요》(3월 13일)
- SBS, 《최수종 쇼 - 서태지 스페셜》(3월 16일)
- MBC, 《서태지 러시아 콘서트》(5월 23일)
- KBS, 《교감 서태지 콘서트》(11월 19일)
- 7집 공백기(2007년)
- M-net, 《서태지 15주년 기념 콘서트》 (2007년 12월 25일)
- 8집(2008년 ~ 2009년)
-
- 첫 번째 싱글(2008년)
- MBC,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8월 6일)
- MBC, 서태지 ETP FEST 2008(8월 26일)
- SBS, 《이적의 텐텐클럽》(10월 1일)
- MBC, 《2008 서태지 심포니》(10월 24일)
- SBS, 《인기가요》(11월 30일)
- MBC, 《쇼! 음악중심》(12월 6일)
- MBC Every1, 《신해철의 스페셜 에디션》(12월 13일, 12월 20일)
- SBS, 《가요대전》(12월 29일)
-
- 두 번째 싱글(2009년)
- MBC, 《쇼! 음악중심》(3월 21일)
- SBS, 《인기가요》(3월 29일)
-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4월 3일)
- SBS, 《인기가요》(4월 5일)
- MNET, M!countdown(4월 9일)
- MNET, The Story of Secret(4월 23일)
- SBS, 서태지 ETP FEST 2009(10월 3일)
서태지 신드롬 분석
서태지는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데뷔 이후 신세대들에게 받은 열광적인 지지와 영향력은 기존 기성세대들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언론에서 붙여준 '문화대통령'이라는 별명은 그 파급력을 잘 표현해 준다.) 언론들은 '왜 하필 서태지인가?'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서적·시사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법들로 '서태지 신드롬'에 대하여 분석하였다.시사 프로그램
- 1집(1992년)
-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 〈감각시대의 서태지〉
- 2집(1993년)
- 문화방송, 《집중보고 오늘》
- 한국방송, 《시청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3집(1994년)
- 한국방송, 《추적 60분》, 〈서태지와 악마소동〉
- 4집(1995년)
- 한국방송, 《추적 60분》, 〈집중분석! 서태지와 아이들〉(12월 17일)
- 6집(2000년)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서태지 신드롬〉(9월 16일)
- 8집 (2008년)
- XTM, 《백지연의 끝장토론》, 〈서태지, 문화대통령인가 vs 비즈니스맨인가〉(8월 8일)
서태지 관련 서적
사회적으로 많은 이슈를 불러일으킨 서태지와 아이들을 분석하는 서적들은 4집이후 본격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1월 31일 이후 2000년 컴백 이전까지 본격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되돌아 평가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주목할만한 점은 (98년 5집 발매 외에는) 전혀 활동이 없었고 컴백의사를 밝히지 않았음에도, 약 5년 동안 지속적으로 서태지에 관한 서적이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서태지와 아이들의 단 4년간의 활동은 은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언론과 대중들에게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6집으로 컴백하면서 서태지가 현재진행형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함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다시 미래로 미루어졌다.여기 등록한 서적들은 가사집, 화보, 악보집, 위인전, 대중가요사 관련 서적 등을 제외한 서적들이다.
- 서태지와 아이들 1~4집(~1996.1)
- 서태지를 읽으면 문화가 보인다(저자/강명석, 출판사/한솔미디어, 출판일/1995)
-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저자/이동연, 출판사/겨레, 출판일/1995.3.1)
- 나는 서태지와아이들을 듣는다(저자/권오흥, 출판사/정보게이트, 출판일/1995.11.1)
- 서태지와 꽃다지:대중문화시대 예술의 길 찾기(저자/이영미, 출판사/한울, 출판일/1995.12.1)
-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이후, 5집 발매이전(1996.2~1998.7)
- 보이는길밖에도 세상은있다(저자/이건, 출판사/하성우디자인연구소, 출판일/1996.5.25)
- 서태지와아이들과 기업경영(저자/신현암, 출판사/삼성경제 연구소, 출판일/1997.09.10)
- 우리들의 젊은 대통령(저자/구자형등, 출판사/오상, 출판일/1997.10.1)
-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아무도 없는가(저자/강명석,김진성, 출판사:프리미엄북스, 출판일/1997.11.1)
- 서태지 1989~1998 (엮은이/서태지문화사랑회,송미옥, 출판사/서태지문화사랑회, 출판일/1998.6.17)
- 서태지 5집 발매이후,6집 발매이전(1998.7~2000.8)
-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 (저자/이상희, 출판사/자음과모음, 출판일/1999.3.25)
- DJ(김대중) TJ(서태지) 닮은꼴 10가지(저자/이동조 외, 출판사/선학사, 출판일/1999.4.1)
- 서태지 담론(저자/김현섭, 출판사/세훈문화사, 출판일/1999.4.1)
- 서태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저자/이동연, 출판사/문학과학사, 출판일/1999.4.1)
- 태지주노양군와 함께한 1036일(저자/최진열, 출판사/명상, 출판일/1999.5.1)
- 서태지 6집 발매이후(2000.9~)
- 서태지맨이야(저자/김진성, 출판사/번양사, 출판일/2000.11.30)
- 서태지 담론(저자/김현섭, 출판사/책이있는마을, 출판일/2001.2.1)
- 서태지 키드가 스펙 세대에게 (저자/배성환, 조은주, 출판사/책든사자, 출판일/2009,1.14)
- 일천구백구십이년 학원댄스로망 YO (저자/정봉재, 출판사/글로연, 출판일/2011,2,28)
서태지에 대한 비판 및 논란
비판
서태지가 등장하고 나서 한국가요계는 랩댄스그룹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서태지는 데뷔 초부터 큰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과 동시에, 갖가지 비판에 직면해왔다.은퇴가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서태지도 인정한 내용이다. 서태지가 한때 몸담았던 시나위의 6집 앨범(1997년 2월 발매)의 〈은퇴선언〉이라는 곡은 서태지의 은퇴를 풍자하고 있다. (이 점에는 많은 이견이 있다. 서태지는 탈퇴 이후에도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과의 관계가 꽤 좋았다는 설이 있어 풍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은퇴 이후 처음으로 발매한 앨범인 5집에 대해서는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과 함께 EP 수준의 짧은 길이의 음반이 너무 비싸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 비판은 2008년에 발매한 싱글과 맥을 같이하며 일부 음악팬들은 3곡과 1곡의 리믹스가 들어 있는 싱글이 다른 가수의 정규 음반 보다 비싸다는 주장을 하기도 특별 대우 등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혼 소송
최근, 배우 이지아와 과거 법적으로 부부관계 였음이 알려지고 또한 현재 이혼 소송 중인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전 이지아와 열애중인 사실을 공식 인정한바 있는 정우성측은 관련 이혼 소송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진술했다.
서태지 매니아
서태지는 공식 팬클럽을 두지 않는다. 서태지 팬들은 일반적으로 서태지 매니아로 통칭되며, 서태지닷컴 공식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생적인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통하여 주로 소통한다. 서태지 매니아들은 어느 사회문화단체 못지않게 대중문화 및 사회이슈에 관심이 있고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 오고 있다. 1996년 사전심의제도 폐지 이후, 음악순위제 폐지운동, 저작권 지키기 등 음악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활발히 해왔다.기타
예명
- 유토피아를 꿈꾸며 內 대담에서 서태지 예명 인터뷰 중
- 원래 서태지의 한자 이름은 없으나, 중국어권에서는 쉬 타이 즈(중국어: 徐太志, 병음: xú tai zhì)로 통용되고 있다.
일명 "서태지 자퇴서"
서태지는 일명 '서태지의 자퇴서'가 인터넷에 떠도는 것에 대해 그 글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며, 언론에 보도된 것은 오보라고 밝혔다.[34]신비주의
신비주의는 서태지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내가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TV 출연 등을 잘 하지 않는다. 다만, 가수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음반 제작, 공연은 꾸준히 하는데 평소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신해철과의 친척관계
신해철이 최근 진행을 맡게 된 MBC 에브리원의 '스페셜 에디션'에서 서태지는 자신과 신해철이 6촌뻘 친척임을 밝힌 바 있다. 이 사실은 서태지가 처음 데뷔했을 때 알려졌으나, 이후 신해철과 둘이 같이 방송출연을 하지 않으면서 잊혔다가 최근에 다시 알려진 것이다. 방송에서 서태지와 신해철은 실제로는 같이 스키장을 다니는 등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임을 과시했다.쫄핑크댄스
8집 첫째 싱글을 내면서 서태지는 자신의 후속곡 〈Human Dream〉에 맞는 안무를 SBS의 《인기가요》 프로그램에서 선보였다. 댄서들이 분홍색 타이츠를 입고 춤을 춘다는 뜻에서 '쫄핑크'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는 곧 UCC를 통하여 급속도로 퍼져 나가 인기를 끌었다. 또 다른 이름으로 '뿌찢댄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15주년 기념앨범 파동 그리고 1 ~ 7집 정규앨범 리마스터링판 재발매
《15주년 기념앨범 - [&] Seotaiji 15th Anniversary》가 2007년 11월 29일 발매를 앞두고 11월 초 예약판매를 시작하였는데 9만 5천원의 고가에도 조기에 품절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1만 5천 장 한정판인 탓에 모든 인터넷 음반구매사이트의 예약이 폭주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서태지컴퍼니 인터넷쇼핑몰 ETP Shop 판매물량도 홈페이지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다운되어 판매가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결국 추첨으로 판매하게 되었다.또한, 앨범발매 취지와는 다르게 인터넷상에서 20만 원 이상의 고가의 가격으로 불공정 거래가 발생하였고 앨범판매 사기사건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팬들의 다중구매 때문에 많은 팬들이 앨범구매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앨범 조기품절 이후 일반판 발매를 둘러싸고 팬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등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생하여 결국 서태지컴퍼니 측에서 1~7집 정규앨범 리마스터링판 재발매를 결정하게 되었다.
2009년 4월 3일 서태지와 아이들 1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2집, 2009년 5월 22일 서태지와 아이들 3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을 재발매했다. 2009년 9월 29일에는 5집이자 첫 솔로 앨범인 Seo Tai Ji가 재발매되었으며, 2009년 10월 29일에는 6집인 Seo Tai Ji 6가 재발매되었다. 빼빼로데이인 11월 11일에는 감성코어인 7집 Seotaiji 7th Issue가 재발매되었다. 1 ~ 7집 리마스터링 재발매 음반에는 15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라이브와 리믹스음원, 디지털 싱글 Watch Out 등이 히든트랙으로 수록되었다.
<출처 : 위키피아 및 인터넷 검색>